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라 말한 유관순!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유관순 열사는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.
올해 기해년 1월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가 유관순 열사라면 그녀의 뒤를 이은 또 한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소개해 봅니다.
유관순이 꽃이 피기도 전인 18세에 세상을 다했다면 김마리아는 중년의 나이 독신의 몸으로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요 여유로운 설날 연휴를 이용하여 방문한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이달의 운동가가 여성임에 유독 호기심이 더 일기도 했습니다.
김마리아는 계몽운동과 구국활동에 힘쓰던 집안의 영향으로 교사가 된 이후에도 교육 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.
1918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2.8독립 선언을 준비하고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서 일제를 규탄하다 연행되기도 하지요.
독립선언문을 감춘 채 귀국한 김마리아는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비다 3.1운동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됩니다.
출감 후 김마리아는 대한민국 애국 부인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성 독립운동 활성화에 이바지합니다.
그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그녀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에 힘을 보태고 큰 활약을 펼치다 1923년 미국 유학을 떠나 여성독립운동 단체 근화회(槿花會)를 조직하는 등 그녀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노력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계속 이어져 갔습니다.
정부는 그녀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.
우리나라의 독립 투쟁을 위한 여성운동은 1919년 3.1운동 이후 혈성단 애국부인회,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 수십 여개에 달하는 여성 비밀 결사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대중적으로 조직화 되었습니다.
김마리아가 활약했던 대한애국부인회에 관한 내용도 제6관 새나라 세우기의 전시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전개된 여러 운동으로 학생이나 노동자, 여성 등 다양한 세력들이 여러 분야에서 민족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더 깊게 알게 되었습니다.
여성의 몸으로서 영화 같은 일대기를 살아가신 김마리아 선생의 이야기를 보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그 시절의 애국지사들의 처연함이 다시 한번 느껴지기도 했습니다.
100년 독립운동이 기록된 독립기념관을 둘러보면서 다양한 분야에서의 여러 사람들의 구국활동과 작은 실천으로 나라를 살리려 했던 국민들의 애국정신을 반추하며 치열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조용하지만 강한 의지를 심어주는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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